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추 이사금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백성]]들을 돕기 위한 [[정책]]들을 펼쳤는데 늙고 [[가난]]한 사람들을 진휼하고, 신하들이 [[궁전]]을 고치자고 했으나 백성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. 또한 백성들이 생계의 근본인 [[농사]]를 짓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농사에 방해가 되는 다른 일들을 일체 없애버렸으며 지방 [[영토]]를 순방하며 백성들을 위로했다고 한다. 대내적으로 선왕인 첨해 이사금 대에 설치한 남당[* 남당의 존재는 [[백제]]에서도 확인된다. [[고이왕]](제8대) 대에 남당을 건설하고, 남당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. 보통 남당은 [[국가]] 정치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상징하는 [[정치]]기구이기도 하며, 신라와 백제가 각각 [[진한]]과 [[마한]]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.]에서 정무를 보았고 아버지 김구도를 갈문왕에 봉했으며 시조묘([[나정]])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. 대외적으로는 전왕들이 그래왔듯 백제와 여러 차례 [[전투]]를 벌였다고 되어 있다. 대체로 백제가 먼저 공격을 하는 구도였는데 공격이 들어오는 족족 막아냈다고 한다. 《[[삼국사기]]》기록상 연대만으로 보면 백제와 신라가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기는 불가능했는데 [[고고학]]적으로 보면 아직 신라계 [[유물]]이 [[경상도]] 전역으로 퍼지지 못했고 미추 이사금 재위 기간과 동시대인 3세기 후반에 쓰여진 《[[삼국지]]》 <위지> -동이전-을 보면 신라([[사로국]])는 여전히 진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 정도의 위상이기 때문이다. 사실 백제도 고고학적으로만 본다면 3세기 후반은 목지국을 막 제압은 했으되 여전히 [[목지국]]이 간접적으로나마 저항하면서 4세기 중반까지는 백제의 [[충청도]] 북부 일대 침투를 어렵게 했기에 3세기 후반 백제VS신라 간 전투는 어려운 상황이다. 《삼국사기》 서술을 믿는다면 미추 이사금이 신라 전체를 대표하는 군주로 재위했던 기간이 실제 연대보다는 후대에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. <[[석우로]] 열전>에 따르면 석우로가 선왕인 첨해 이사금 때 왜인들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후 남겨진 석우로의 아내와 아들들이 왜인들에게 복수심을 품었고, 미추 이사금 시기에 왜국 대사가 신라에 와 있던 어느 날, 대사를 술에 취하게 만들고 불태워 죽여버림으로써 원수를 갚았지만 [[외교관]]을 살해한 것에 분노한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[[경주시|금성]]을 포위했다가 소득 없이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. 석우로 시기에 고구려와의 충돌이 있었고, 석우로가 대[[일본|왜]]전, 대[[가야]]전과는 달리 유독 대[[고구려]]전에서 자주 패배해서 명망이 실추되었던 정황으로 보면 고구려 또한 3세기 후반에 신라와 전투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또다시 미추 이사금 대 사건이 3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음에 무게가 실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